책소개
이옥의 작품은 ≪담정총서(藫庭叢書)≫에 수록된 문집들에 주로 소개되어 있지만, 그의 시문학론과 민풍시 이언(俚諺)은 ≪예림잡패(藝林雜佩)≫ <이언인(俚諺引)>에 수록되어 있고, 희곡집 ≪동상기(東床記)≫도 따로 전한다.
≪담정총서≫는 조선 후기 정조가 문체반정 정책을 펴면서 패사소품체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한 담정(藫庭) 김려(金鑢)에 의해서 간행된 필사본이다. 김려의 문집 ≪담정유고(藫庭遺藁)≫ 권10 <총서제후(叢書題後)>에는 김려가 편찬한 문집의 제후(題後), 예를 들어 김시랑의 <현수관소고권후(玄水舘小稿卷後)>를 시작으로 이익지(李益之)의 <죽장산고권후(竹莊散稿卷後)>등 여러 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보면 ≪담정총서≫에는 39권의 문집이 수록되어 있을 것이다.
이 총서는 통문관(通文館)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맨 처음 소개한 이는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선생이다. 선생은 ≪이조한문소설선≫(민중서관, 1961년)에 이옥의 전문학(傳文學) 23편 중 15편을 뽑아 소개했다. 이옥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역자의 석사학위 논문 <이옥연구>에서 그의 생애와 세계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옥연구>는 이옥의 문집 일부만을 소장자로부터 얻어 보고 소개한 것이어서 작가 생애에 대한 오류가 없지 않았다. 그 뒤에 역자는 <이옥의 문학 이론과 작품 세계의 연구>에서 그의 생애와 세계관 그리고 문학 이론과 작품 세계를 재론한 바 있다. ≪예림잡패≫에 수록된 <이언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수장된 필사본을 역자가 학계에 처음 소개해 알려지게 된 자료다. <이언인> 제목 아래 기록된 저자는 연안(延安) 이옥(李鈺)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 때문에 이옥의 본관에 대해서 학계에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이언인>의 서문에 해당하는 <일난(一難)>, <이난(二難)>, <삼난(三難)>은 이옥의 시문학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언>에는 그의 작품 66편의 절구가 수록되어 있는데 ‘아조(雅調)’ ‘염조(艶調)’ ‘탕조(宕調)’ ‘비조(悱調)’ 등으로 구분되어 있고 민풍시(民風詩) 성격이 강하다. ≪동상기≫는 현재까지 5편의 이본이 전한다.
이옥의 현실에 대한 인식 태도를 살펴보면 생애 전·후반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성균 유생 시절에 쓴 음양오행이나 불교의 윤회에 관한 글 등에서는 유교적 경험론에 입각한 합리주의적 사고를 보여 준 반면에, 문체로 인해 입신의 길을 포기한 뒤에 쓴 글 등에서는 신비체험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현실에 대해 반유교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인 인식 태도를 보여 준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는 인간 본래의 모습과 계층 간의 역할이 따로 있음을 전제하고 소속된 계층에 관계없이 인간 존엄성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군자(君子)와 야인(野人)과의 관계를 상보적 관계로 파악해 민생의 역할을 분명히 했고, 평등주의에 입각해 민생의 존엄성도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민중들의 반도덕적 행위에 관심을 보이면서 민중들의 이런 행위에 대한 근본적 책임이 지배계급의 민중 수탈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유교적 도덕주의를 엄격히 실천할 것을 지배계급에 요구하기도 했다.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그는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가 문체 때문에 삼가[三嘉, 다른 이름은 봉성(鳳城)]현에 충군되어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 견문했던 것을 기록한 <봉산문여>는 당시의 영남 민속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그는 여기서 종래의 모화적(慕華的) 의식에서 탈피해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투철한 자존의식으로 화이론(華夷論)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전통문화에 대한 주체의식은 그의 문학관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조선 사람은 조선의 문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 역서에서는 이옥의 모든 작품을 소개할 수 없으므로 작품 유형별로 선별해서 실었다.
200자평
틀에 박히지 않은 묘사, 고루하고 딱딱한 글이 아니라 생생하고 자유로운 글을 썼다 해서 과거 응시를 금지당하고, 두 번이나 군대에 가야 했던 선비가 있다. 정조의 유일한 오점으로 불리는 ‘문체반정’의 대표적인 희생자였던 이옥. 그러나 죽는 날까지 자신의 신념대로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진정한 글쟁이 이옥의 작품을 만나 보자.
지은이
이옥(李鈺, 1760∼1814)
문무자(文無子) 이옥(1760∼1814)은 자(字)가 기상(其相)이고, 본관은(本貫)은 전주(全州)며, 본가는 경기도 남양(南陽)이다. 그는 젊은 시절 성균 유생으로 한양에서 활동했다. 조부 이동윤(李東胤)은 서족(庶族) 무반(武班) 출신이고, 부친 이상오(李常五)는 1754년에 진사에 급제했으며, 이옥은 성균 유생 시절인 1790년에 생원시에 급제했다. 슬하에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의 초명은 우태(友泰)다.
그의 성장을 알려 주는 연보가 없어 생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저술 등을 통해서 추적해 보면, 그는 30세를 전후해 한양에서 성균 유생의 신분으로 활동했다. 1792년에 임금이 성균 유생들에게 열흘에 한 번씩 내려 준 글제에 따라 지은 그의 글이 순전히 소설문체로 작성되었다고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선비들은 이런 소설문체를 유행처럼 답습했는데 정조는 당시 성균 유생들로 하여금 매일 사륙문(四六文) 50수를 채우게 해 문체를 바르게 한 후에 과거 시험에 나아가도록 명했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바로 이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그의 문집 <봉성문여(鳳城文餘)>의 <추기남정시말(追記南征始末)>에 의하면, 그가 성균 유생으로 있던 1796년(36세)에 정조가 그의 문체를 보고 괴이하다고 과거를 보지 못하게 했다가 충청도 정산현에 충군(充軍)하게 했다. 그해 9월에 다시 돌아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문체를 고치지 못해 다시 영남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충(移充) 편적(編籍)되었다가 사흘 후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1797년(37세)에 별시(別試) 초시(初試)에서 장원을 차지했으나, 그의 책문이 근래의 격식에 어긋났다 해서 방말(榜末)에 붙여졌다. 방말이었지만 과거에 급제를 했으므로 문체로 인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는데도 그는 충군에 대한 청원을 하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1798년(38세)이 되던 봄에 삼가현에서 소환 독촉이 심해지자, 형부, 병부, 예부에 들러서 청원을 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결국 1800년(40세) 10월에 다시 삼가현에 내려가 118일 동안을 그곳에 머물고 이듬해 2월에 귀향했다.
그 뒤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신유옥사(辛酉獄事)가 일어났던 1801년(41세, 순조 1년)에 그는 잠시 귀경했지만, 성균 유생 시절에 교분을 나누었던 김려(金鑢)와 그의 아우 김선(金鏇) 그리고 강이천(姜彛天) 등과 헤어져서 다시 본가에 돌아와 은둔자적하며 일생을 마칠 때까지 저작 활동에 몰두했다.
옮긴이
연영(淵映) 김균태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국어교육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성산 장덕순 교수의 지도를 받아 <이옥의 문학이론과 작품 세계의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원 재학 중에 우전 신호열 선생 문하에서 ≪사서삼경≫과 ≪노자≫, ≪장자≫, ≪순자≫ 등 제자백가서를 비롯해서 ≪사기≫ <열전>과 한중(韓中) 시문 등을 읽었다.
198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전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지도교수의 영향을 받아 구비문학에 관심을 가져 ≪구비문학대계≫(화순, 장성 편)를 공저로 출간했으며, ≪부여효열지≫를 번역하고, 충청 도서지역의 구비문학을 비롯해서 부여군, 금산군 일대의 설화들을 조사해 자료집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차례
운문(韻文)
1. 이언(俚諺)
아조 雅調 ·····················3
염조 艶調 ·····················7
탕조 宕調 ····················11
비조 悱調 ····················15
2. 부(賦)
개구리가 우는 사연 후편 後蛙鳴賦 ·········18
물고기들의 먹이사슬−병오년 여름에 쓰다 魚賦−丙午夏 ·······················23
용처럼 생긴 포도나무 草龍賦 ···········25
거미의 충고 蜘蛛賦 ···············28
아들 다섯 가진 어미의 탄식 五子嫗賦 ········32
산문(散文)
1. 논설(論說)
북관 기녀의 밤중 통곡을 논함−원 사실을 병서 北關妓夜哭論−幷原 ·················39
접시꽃에 대해 蜀葵花說 ·············48
2. 잡문(雜文)
매미가 고하다 蟬告 ················52
원통경 圓通經 ················56
서풍을 논하다 論西風 ··············59
3. 기문(記文)
호상에서 씨름을 구경하고 湖上觀角力記 ······68
저잣거리의 소매치기 市奸記 ············71
담배 연기 경문 烟經 ···············77
방언 때문에 方言 ·················82
4. 전지(傳誌)
거지 간교를 면한 성 진사 成進士傳 ········85
호랑이 잡은 산골 아낙 捕虎妻傳 ·········88
5. 문여(文餘)
사당패의 생활상 社黨 ··············91
무당굿 巫祀 ··················95
무가 사설의 와전 巫歌之訛 ············97
가마를 탄 여 도적 乘轎賊 ············100
석굴에서 도적들이 엽전을 주조하다 石窟盜鑄 ····102
해설 ······················105
지은이에 대해 ··················114
옮긴이에 대해 ·················117
책속으로
●차린 밥상 끌어다가
내 얼굴에 던진다네
낭군 입맛 달라졌지
있던 솜씨 달라질까
●이러므로 용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가물어 마르면 반드시 비를 내려 주고, 사람이 고기를 다 잡아 바닥을 드러낼 것을 염려해 큰 물결을 일으켜 그 고기를 덮어 주니, 그것이 고기에 있어서는 은혜 아님이 없다.
그러나 고기에게 인자한 것은 한 마리의 용이요, 고기를 학대하는 것은 수많은 큰 고기들이다. 고래[鯨鯢]가 조류를 따라 들이마셔 작은 고기로 자신의 시서(詩書)를 삼고, 상어[鮫]나 악어[鰐]가 물결을 다투어 마시고 씹어서 작은 고기로 일을 삼으며, 모래무지[鯊] 쏘가리[鱖] 드렁허리[鱔] 가물치[鱧] 족속은 바로 틈만 나면 덮쳐 작은 고기로 노리개를 삼아, 강자가 약자를 삼키고 윗것이 아랫것을 업신여기니 진실로 이들이 그런 일을 싫증 내지 않는다면 작은 고기는 반드시 남지 않을 것이다.
슬프다, 작은 고기가 없다면 용이 누구와 더불어 임금이 되고 큰 고기들이 어찌 스스로 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용의 도(道)는 그들에게 구구한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보다 차라리 먼저 그들을 해치는 족속들을 물리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어떤 이가 말했다.
“땅 때문이다. 땅 때문에 산골짜기 말이 바닷가 말과 다르고, 바닷가의 말은 들녘의 말과 다르며, 도시의 말은 시골의 말과 다르다. 북방의 말은 여진과 비슷하고, 남방의 말은 왜와 비슷하다. 폐는 소리를 주장하고, 마음은 정을 주장하며, 그 땅에서 난 것을 먹고, 그 땅에서 난 것을 마시는데, 어찌 그 말소리가 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이는 말했다.
“그렇지 않다. 한성은 나라의 중심이고, 도성 가운데는 백성이 있다. 고함질러 부르고 응대해 대답하고, 부르짖고 울며, 상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나, 만물에 이름을 짓는 것이 대부분 일반 백성들과 달라서 따로 반민(頖民)이라고 한다. 이것이 어찌 땅 때문이겠는가? 풍속 때문이다.”
호서 사람으로 날 따르던 자가 여관에 들러 주인에게, 지금을 ‘산대(産代)’라 이르고, 가을을 일러 ‘가슬(歌瑟)’이라고 하며, 마을을 일러 ‘마슬(瑪瑟)’이라 하니, 영남의 주인이 크게 웃었다. 영남의 주인이 호서 사람의 말을 두고 웃은 것이지만, 호서 사람 또한 영남 사람의 말을 두고 웃은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호서 사람이 영남 사람의 말 때문에 웃은 것이 옳은지, 영남 사람이 호서 사람의 말 때문에 웃은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또 호서 사람과 영남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람의 말을 두고 웃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